
글로벌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재료공학 솔루션 기업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 캠퍼스에서 차세대 반도체 공정 기술 및 제조 장비 연구개발(R&D)을 위한 전용 시설인 'EPIC(Equipment and Process Innovation and Commercialization) 센터'를 12일(현지시간) 공개했다.
총 50억달러(약 6조7500억원) 규모의 자본 지출이 점진적으로 투입되는 EPIC 센터는 협업형 반도체 R&D 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성능 인공지능(AI) 컴퓨팅 구현에 필요한 차세대 반도체 기술의 개발과 대량 양산 상용화 시점을 획기적으로 앞당기기 위해 기획됐다.
EPIC 센터가 들어선 60만 제곱피트(약 5만5700㎡) 규모의 건물에는 약 4에이커(약 1만6200㎡) 크기의 첨단 클린룸이 조성됐다. 완공까지 600만 시간이 넘는 공사 시간이 소요됐으며, 건물 기초에만 올림픽 규격 수영장 34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의 콘크리트가 투입됐다. 클린룸 상부를 받치는 지붕 트러스 34개는 각각 길이가 300피트(약 91m)에 달하며 무게는 스쿨버스 12대 수준에 육박한다.
어플라이드가 이처럼 거대한 전용 R&D 생태계를 조성한 배경에는 기존 반도체 개발 방식의 한계가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 업계는 기초 재료 연구, 장비 및 공정 개발, 파일럿 생산을 각기 다른 환경에서 순차적으로 진행해 왔다. 하지만 원자 수준의 미세 공정으로 접어든 AI 시대에는 기존의 단계별 인계 방식만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기술 복잡성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EPIC 센터는 재료 개발자와 장비 제조사, 최종 칩 생산자가 한 공간에 모여 기술 구상 단계부터 최적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팹에 실제 장비가 도입되기 전부터 긴밀한 피드백을 통해 기술의 완성도를 높임으로써 수율 확보와 양산 적용 시간을 극적으로 줄인다는 전략이다.
게리 디커슨 어플라이드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AI 인프라 확장으로 고성능 컴퓨팅 요구가 제조 로드맵 전반에 전례 없는 복잡성을 야기하고 있다"며 "AI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차세대 반도체 기술의 개발과 상용화를 위한 협업 방식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메이저 기업들도 EPIC 센터 생태계에 창립 파트너로 대거 이름을 올렸다. TSMC를 비롯해 인텔, 삼성전자, 마이크론, SK하이닉스가 참여하며 브로드컴, 아드반테스트, 스크린, 키옥시아, 베시 등이 혁신 파트너로 합류했다. 학계에서는 스탠포드 대학교, UC 버클리, UCLA, 애리조나주립대(ASU), 렌셀러 폴리테크닉 대학교(RPI) 연구진이 손을 잡았다.
공개 행사 당일에는 각 파트너사의 최고경영진과 R&D 리더들이 모여 글로벌 칩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기술적 난제를 다루는 서밋을 가졌다. 프라부 라자 어플라이드 반도체 제품 그룹(SPG) 사장은 "원자 수준의 미세 영역에서는 재료 간 계면이 완전히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며 "EPIC은 재료, 공정, 장비를 동시에 혁신해 새로운 기술의 성공률을 높이는 유일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장에 참석한 주요 파트너사 리더들도 이번 협업에 대해 큰 기대감을 드러냈다.
웨이저자 TSMC 회장 겸 CEO는 "30년 전 최첨단 양산 노드는 350나노미터였지만 오늘날에는 2나노미터에 이르며 피처 크기를 175분의 1로 줄여왔다"며 "2나노미터를 넘어서는 차세대 기술에서도 어플라이드와 협업해 저저항 배선, 첨단 패키징 등 차세대 에너지 효율적 AI 아키텍처의 R&D에서 대량 양산으로의 전환을 앞당길 것"이라고 밝혔다.
립부 탄 인텔 CEO는 "인텔은 2030년까지 하나의 패키지에 1조 개 이상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며 "반도체 아키텍처가 더욱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EPIC은 기술 개발을 가속하고 R&D 효율을 높여 신기술을 시장에 빠르게 선보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메모리 분야의 리더십 확보를 위한 한국 기업들의 행보도 구체화됐다. 송재혁 삼성전자 DS부문 CTO는 "삼성전자는 메모리, 첨단 로직, 첨단 패키징을 아우르는 기술 역량을 바탕으로 AI 시대 컴퓨팅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며 "EPIC을 통해 혁신 기술의 개발부터 고도화, 실제 적용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한층 가속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AI 컴퓨팅의 핵심은 프로세서에 데이터를 충분히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라며 "SK하이닉스의 첨단 메모리 리더십과 어플라이드의 재료공학 기술을 결합해 HBM, D램, 낸드 전반의 주요 기술 전환점에 대응하고 메모리 혁신을 가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밖에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회장 겸 CEO 역시 "차세대 메모리 기술을 연구 단계에서 대규모 양산으로 이어가는 데 EPIC과의 협업이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계 연구진과 대학 학생들에게도 실제 산업 현장 수준의 첨단 장비와 환경을 접할 기회가 열렸다. 연구실 내부의 대담한 아이디어가 상용화 팹으로 연결되는 기간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어플라이드는 EPIC 센터 운영을 통해 여러 세대 앞선 기술 과제를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R&D 투자 방향을 명확히 설정한다는 방침이다. 고객사 프로젝트 진행 상황에 맞춰 자본 투입을 점진적으로 진행하며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축 역할을 강화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