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정유 및 석유화학 공장은 설비 단 한 대의 미세한 이상 징후로도 수백억 원 규모의 공정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 그만큼 도면이나 수치화된 데이터 못지않게 오랜 기간 현장을 지켜온 숙련 엔지니어의 경험적 판단이 핵심 자산으로 꼽힌다. 그러나 기존의 설비 데이터나 기술문서, 단순 정비 이력만으로는 이 같은 베테랑들의 직관과 숙련된 노하우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웠다.
엔터프라이즈 에이전틱 AI 기업 인핸스가 GS칼텍스와 손잡고 이러한 제조 현장의 숙련자 경험과 판단 기준을 직접 데이터화하는 ‘제조 암묵지 기반 AI 모델’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 과제는 인핸스가 주관연구개발기관으로서 전체 시스템 개발 및 총괄을 맡고 GS칼텍스가 실제 현장 데이터를 제공하는 수요기업으로 참여한다.
개발 대상의 규모부터 거대하다. GS칼텍스가 보유한 총 83만 2996대의 설비와 관련 비정형 문서 2900여 건이 이번 AI 모델의 학습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단순히 텍스트 형태의 기술문서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정형 수치를 AI가 읽어내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장치, 기계, 전기, 계기 등 각 분야에서 수십 년간 축적된 현장 엔지니어들의 정성적인 경험과 판단 흐름을 직접 추출해 결합하는 작업이 병행된다.
인핸스는 현장 엔지니어들과의 깊이 있는 인터뷰를 통해 설비 이상 발생 시 상태를 확인하는 구체적인 순서,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 유력한 원인을 단계적으로 좁혀나가는 고유의 기준, 특정 예외 상황에서 추가로 고려해야 하는 가변적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수집한다. 책자나 파일 형태의 표준 운영 지침서(SOP)에는 명시되지 않은 현장의 실제 '암묵지'를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하는 셈이다.
이렇게 수집된 지식은 설비와 부품, 이상 징후, 원인, 구체적인 조치 내용 간의 복합적인 관계를 체계적으로 표현하는 '온톨로지(Ontology)' 구조로 설계된다. 서로 다른 포맷으로 파편화되어 있던 설비 데이터와 정비 기록, 기술 표준서, 그리고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현장 경험이 하나의 결합된 지식망으로 재구성된다. 특정 이상 상황이 포착됐을 때 AI가 가장 적절한 정보와 객관적 판단 근거를 복합적으로 추출해낼 수 있는 배경이다.
구조화된 지식 체계는 현장 작업자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Guide 챗봇’ 형태의 인터페이스로 구현될 예정이다. 현장 담당자가 특정 설비의 이상 상태나 구체적인 정비 작업 상황을 평소 사용하는 자연어로 질문하면, AI는 발생 가능한 원인 후보군과 권장 점검 순서를 곧바로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챗봇은 단순히 답변만 내놓지 않고 과거 정비 이력 및 내부 기술표준 등 해당 판단의 근거가 된 원문 출처를 함께 명시해 정확도를 직접 검증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핵심은 AI가 인간의 의사결정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Guide 챗봇은 설비 상태를 독단적으로 단정 짓거나 조치를 직접 결정하지 않는다. AI가 83만여 대 설비 지식망을 기반으로 필요한 정보와 원인 추정치, 과거 데이터 근거를 빠르게 다듬어 제시하면, 최종 판단과 실질적인 조치 결정은 현장의 인간 엔지니어가 직접 진행하는 안전 장치를 마련했다. 보안 유지와 데이터 유출 방지를 위해 전체 시스템 개발 환경은 GS칼텍스 내부 온프레미스(On-Premise) 망에 구축된다.
이번 프로젝트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진하는 ‘2026년도 제조암묵지기반 AI모델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오픈그래프랩스가 비정형 문서의 정밀한 파싱을 담당하고, 전남대학교와 광주과학기술원(GIST)이 공동연구기관으로 합류해 산학연 협력 체계를 완성했다.
그동안 제조 분야의 AI 도입은 센서 데이터를 통한 고장 예측이나 단순 규정 검색 차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인핸스와 GS칼텍스의 이번 시도는 숙련자의 노하우라는 암묵적 자산을 실제 공정 판단 보조 시스템으로 양식화하는 시도로, 대형 플랜트 현장의 문제 해결 속도와 정밀도를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 업계의 시선이 모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