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전력 메모리의 동작 속도와 수명 한계를 동시에 극복한 기술이 국내 연구진을 통해 개발됐다.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상용화의 걸림돌로 꼽히던 핵심 난제를 해결하면서 AI 서버와 모바일 기기용 메모리의 전력 효율을 끌어올릴 돌파구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 박민혁 교수 연구팀은 0.6V의 저전압에서 빠르게 동작하면서도 1조 회의 반복 구동을 견뎌내는 강유전체 캐패시터를 새로 개발했다. 한양대학교, 포항가속기연구소, 삼성전자 연구진이 공동 참여한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게재됐다.
최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과 스마트폰 성능 강화로 고대역폭 메모리(HBM) 및 모바일용 LPDDR 등 저전력·고속 메모리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고속 휘발성 메모리인 DRAM은 데이터를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하를 다시 채워 넣는 '리프레시' 동작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이 깎여 나간다.
반면 강유전체 메모리는 물질 내부의 전기적 방향인 '분극'을 활용해 전원이 꺼져도 정보를 기억하는 비휘발성 소재다. 리프레시 동작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어 차세대 유망 메모리로 꼽혀왔다.
문제는 동작 속도와 수명 간의 극심한 상충관계였다. 소재의 분극을 빠르게 바꿀수록 더 높은 전압이 필요했고, 높아진 전압은 소자 절연 파괴를 유발해 수명을 급격히 갉아먹었다. 산화하프늄과 산화지르코늄을 조합해 반도체 공정 호환성이 높은 강유전체 소재인 '하프니아-지르코니아(HZO)' 역시 이 '속도-수명 딜레마'를 피하지 못했다.
박민혁 교수 연구팀은 이 한계를 소자 내부의 계면 제어로 뚫어냈다. 원자층 증착법(ALD)을 이용해 질화티타늄(TiN) 전극의 결정 방향과 표면 특성을 조절하고 계면 산화를 원천 차단했다. 얇고 균일한 계면층을 만들어 전압 손실을 최소화한 것이다.
결과는 독보적이었다. 두께 5nm의 HZO 캐패시터는 0.6V라는 매우 낮은 전압에서도 뚜렷한 분극 전환을 이뤄냈다. 전체 분극의 절반이 뒤집히는 데 걸린 시간은 0.6V에서 약 40ns(나노초·10억 분의 1초), 1V에서는 8ns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두 전압 조건 모두에서 1조 회 반복 구동 후 소자 파괴가 관측되지 않았다. 내구성과 동작 속도, 저전압 특성을 동시에 챙긴 셈이다. 소자 면적을 나노미터급으로 줄일수록 분극 전환이 더 빨라지는 경향도 확인되어 초고속 DRAM급 동작 가능성까지 입증했다.
연구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DRAM 구조와 유사한 '1T-1C(트랜지스터 1개, 캐패시터 1개)' 기반의 '공통 플레이트 강유전체 메모리(CP-FeRAM)' 작동 모델을 제시했다. 소자가 작아져 신호가 약해지더라도 강유전체의 큰 잔류 분극을 이용하면 정확한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 집적도를 극대화하면서도 초저전력으로 구동되는 차세대 DRAM 구현 기반을 닦은 셈이다.
이번 연구의 제1저자인 박근형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은 향후 메모리 소자의 구조 설계와 동작 특성 분석 경험을 바탕으로 AI 반도체의 전력 효율을 끌어올릴 저전력 메모리 개발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 삼성전자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박민혁 교수는 "전극과 계면 설계를 통해 저전압·고속·고내구성이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동시에 확보했다"며 "강유전체 메모리의 오래된 핵심 난제였던 속도와 수명의 상충관계에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이어 "이미 반도체 양산 현장에서 사용 중인 HZO 소재를 기반으로 한 만큼, 고집적 DRAM은 물론 연산 회로와 결합하는 저전력 임베디드 메모리 등 산업 현장에 빠르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